루드 굴리트(뤼드 휠릿, Ruud Gullit)
1962년 9월 1일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 출생
191cm 88kg
네덜란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이다.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 2017년부터 2018년까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았다. 네덜란드의 첫 메이저 대회 우승과 밀란 제너레이션을 이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 중 한명이며 1980년대부터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마르코 반바스턴, 프랑ㄹ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오렌지 삼총사의 일원으로 명성을 떨쳤다. 수리남 출신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소속된 클럽마다 우승을 한다는 이유로 우승 청부사 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굴리트는 하를럼 소속으로 16세의 나이로 데뷔하여 에레디비시 최연소 출장 기록을 다시 썼으며 팀은 강등당했으나 굴리트의 활약으로 다시 승격한다. 1981-82 시즌에는 하를럼을 리그 4위로 올리며 UEFA컵 티켓을 따낸다. 이는 하를럼 역사상 유일한 유럽 대항전 출전이다. 이때의 활약으로 굴리트는 네덜란드의 던컨 에드워즈라는 별명을 얻는다.
세 시즌 동안 91경기 31골을 넣은 굴리트는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으로 이적하여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뛰면서 1982-83 시즌에 리그우승과 KNVB 베이커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인종차별 발언을 듣기도 해서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해 리그 2연패를 이끌고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도 받았다.
이후 AC밀란으로 이적하여 1987-88 시즌 디에고 마라도나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1987년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특히 판바스턴과 투톱을 이뤄 맹활약하며 세리에A 우승을 이끌었다.
1988-89 시즌에는 오렌지 삼총사를 결성하여 아리고 사키의 압박 축구를 토대로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판바스턴과 굴리트가 2골씩 득점하며,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상대로 4:0 대승을 거두었다.
1989-90 시즌에도 SL벤피카를 격파하여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지만, 굴리트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기량이 하락했다.
또 다음시즌인 1990-91시즌에는 사키이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수비 라인을 운용하는 전술이 오프사이드룰 변경때문에 밀란이 이런 점을 적응하는데 힘이 들었다. 또 유러피언컵 4강에서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만나 밀란이 패배한다. 여기서 밀란은 조명이 망가져 재경기를 해야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그냥 경기장을 떠나버렸고 이에 UEFA는 1년간 유러피언컵 출전 금지를 내린다. 사키는 이를 마지막으로 밀란을 떠난다. 하지만 파비오 카펠로감독이 부임해 그의 밀란을 잘 계승해내며 다시 전성기를 이끌어낸다. 카펠로 감독 체제에서 1991-92 시즌에 리그 무패 우승과 그 다음 시즌도 우승을 경험하며 리그 2연패. 또 1992-93 시즌에는 유러피언컵에서 준우승하는등 발군의 활약을 펼친 후 1993년에 밀란을 떠나 UC 삼프도리아에서 뛰었는데 스벤예란 에릭손감독의 밑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잠시 밀란에 복귀했으나 큰 활약은 하지 못했고 첼시FC에서 선수 겸 감독을 하며 FA컵우승을 차지한 후 은퇴했다.
굴리트의 선수 생활을 설명하자면 먼저 네덜란드의 축구가 어떤 위기를 겪고 있었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분명히 네덜란드는 리누스 미헬스감독의 지도 아래 천재 요한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들이 들고 나온 토탈 풋볼은 축구의 혁명이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나름 영광을 이어 갔지만, 리누스 미헬스가 떠나는 등 영광의 멤버들이 노쇠하고 흩어지면서 침체가 시작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오렌지 삼지 삼총사 등장 이전까지 1970년대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결국 리누스 미헬스가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세대로 팀을 짜게된다. 당시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유럽을 제패하고 있던 AC밀란의 오렌지 삼총사 마르코 반바스텐, 프랑크 레이크라트, 루드 굴리트 그리고 삼총사 더해서 달타냥이라는 로날드 쿠만까지. 그리고 이 선수들을 조화롭게 묶어줄 수 있는 선수가 최상의 피지컬과 최고의 전술이해도를 겸비한 굴리트였다. 굴리트는 가장 전술이해도가 좋은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역사상 이보다 범용성이 좋은 축구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센터백을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A급으로 뛰는 선수였다. 말 그대로 네덜란드 대표팀의 핵심은 휠릿으로 시작해서 휠릿으로 끝났다.
1988년 네덜란드의 유로 우승은 바로 1974년 크루이프의 역할을 그대로 이식받은 굴리트의 역할이 가장 컸다. 정확히 네덜란드가 예전의 포스를 되찾은 시작점이 UEFA유로 1988이었고, 그 뒤를 이은 대회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물론 굴리트의 플레이는 나무랄데가 없었지만, 이때 네덜란드가 16강에서 마주친 상대는 그 대회 우승팀, 카이저 베켄바워의 독일이었다.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16강전에서 레이카르트와 루디 푈러가 충돌했고 이 와중에 레이카르트가 루디 푈러에 침을 뱉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푈러와 레이카르트 모두 퇴장당했으나, 푈러가 없는 독일과 레이카르트가 없는 네덜란드의 무게감 자체가 달랐다. 적어도 푈러보다 레이카르트가 훨씬 뛰어난 선수였으니…… 그리고 네덜란드는 석연치 않게 16강에서 월드컵을 접어야 했었다.
스웨덴에서 열린 UEFA 유로 1992에서 네덜란드는 조별예선에서 독일을 3:1로 뭉개버리면서 그대로 복수한다. 바로 레이카르트 본인이 득점을 하면서, 또한 휠릿은 이 대회에서 종횡무진 중원을 탈탈 털어버리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4강전 상대는 브리안 라우드루프와 페테르 슈마이켈이 버티던 덴마크였는데 아쉽게 네덜란드는 보따리를 싸들고 돌아왔어야 했었다.
하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에는 불참했다. 이 대회는 네덜란드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 시절이 네덜란드의 드림팀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1994년의 네덜란드는 더더욱 역대급의 전력으로 구축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미헬스 이후 취임한 딕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에서 굴리트와 아드보카트의 불화, 판바스턴의 부상이 겹쳐 온전한 전력으로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었다. 결국 8강에서 맞이한 브라질에 고배를 마시면서, 탈락했고 휠릿은 1994년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최고의 피지컬과 최고의 기술적 완성도를 겸비했는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190cm에 88kg의 스펙의 커다란 몸집을 이용한 강력한 몸싸움과 뛰어난 헤더, 100m를 10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와 화려한 기술을 가졌고 축구 지능과 전술 이해도가 매우 뛰어나 모든 포지션을 일류 레벨로 소화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뛰었다고 평가 받은건 공격형 미드필더. 축복받은 피지컬과 높은 전술 이해도와 화려한 발재간까지 갖추어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의 라이벌로 꼽힌 선수 중 한 명이다.
특히 이 전술 이해도는 특히 굴리트의 현역 시절에 가장 도드라졌던 점인데, 그야말로 축복을 받았다고 밖에 표현이 불가한 전술 이해도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피지컬로 굴리트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수준급 기량으로 소화할 수 있었다.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냐고 하면, 국가대표팀 경기를 해야 할 때 마르코 반바스텐이 부상 등으로 결장하게 되면 굴리트가 그 자리를 대신할 정도였다. 판바스턴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당대에 따라올 자가 없는 최고의 공격수였다. 그런 공격수의 빈자리를 트레콰르티스타가 채웠다는 말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윙어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한 칸 아래의 중앙 미드필더로서 출전했을 때 그가 보여주는 경기력과 중원 장악력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이 시대 미드필더로 비교하자면 야야 투레를 예로 드는 게 정확할 것이다. 거의 모든 능력치에서 투레보다 굴리트가 앞선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이렇게 굴리트는 천재적인 전술 이해도와 축구 지능을 가지고 있었고, 이 덕분에 모든 이들은 그가 감독이 된다면 큰 성공을 거두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공식은 굴리트조차 벗어날 수 없는 것이어서, 이후 서술될 감독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단 한 번의 성공 이후 쓰디쓴 실패만을 경험해야 했다.
2000년대에는 오렌지 삼총사 모두가 유일하게 게임 위닝 일레븐에서 레전드 팀의 일원으로 등장해서 플레이할 수 있었다.
이때는 으레 그렇듯 라이센스 문제로 게임상에는 굴라스(Gullas)라고 나와 있었다.
일단 포지션은 골키퍼을 제외한 전체 라인이 활동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가 보라돌이일 때 골치가 아파지지만, 네덜란드는 그 범용성에서 아르헨티나를 초월한다.
예를 들자면
1.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가 보라돌이일 때는 = 굴리트를 윙어로 넣는다.
2. 마르코 반바스텐이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센터 포워드로 넣는다.
3. 에드가 다비즈가 죽었다 = 굴리트를 중앙 미드필더로 넣는다.
4. 로날드 쿠만이 죽었다 = 굴리트를 스위퍼에 넣는다.
전 영역에서 98이라는 아름다운 능력치를 자랑하는 굴리트를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 피파 14와 피파온라인3에서 개사기 캐릭터로 출시되며 유명해졌다. 특히 피온에서는 발매 후 1강이 35억 EP를 기록하는 등 정신나간 밸런스 브레이커로 활약 중. 이후 조각 이벤트 등이 겹쳐 10억 EP대까지 떨어졌다가 입소문을 타며 계속해서 시세가 올라 +1카가 160억 까지 상승하였다. 한동안 피파온라인3 가격 최강자 5위 안에 꾸준히 들었다. 역시 알베스, 즐라탄, 투레를 합친듯한 미친 성능은 덤. 피온에서는 레벨 20을 찍으면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스텟이 100을 넘어가는 정신나간 스텟을 자랑한다. 반 농담 반 진담으로 11명을 동일한 선수를 넣는다면 어떤 선수를 쓸 것인가 하는 떡밥에서 백이면 백 추천하는 선수. 그만큼 모든 부분에서 뛰어나다. 심지어 0카를 갖다 써도 어지간한 선수 1카 이상의 효과를 보이는 미친 존재감을 보인다. 전술적인 요인이 그렇게 크지 않은 아마추어~프로페셔널 단계의 순위경기에서는 피시방 선수로 굴리트가 나오면 이거 하나로 이기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얼티밋 레전드 카드가 출시된 이후에는 호나우두에 밀려 가격 순위 2위가 되었다.
굴리트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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