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est Player

Best player 미하엘 발락 스페셜

미하엘 발락 (Michael Ballack)

미하엘 발라크

 

1976년 9월 26일생

독일

189cm 80kg

 

2000년대 전차군단을 이끈 월드클래스 미드필더 발락!

97년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입단을 했으나 전반기 시즌은 2군에서 보냈고 99년 3월 레버쿠젠과의 리그경기를 통해 프로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데뷔시즌에 팀이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바로 우승커리어를 새기는 영광을 누린다. 다음 시즌 서서히 주전선수로 도약을 하고 98-99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출전하여 8강까지 갔으나 같은 리그소속인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하게 된다.

본격적인 전성기가 열린 시절로 과거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선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다면 레버쿠젠에선 보다 더 공격적인 역할을 부여받으며 레버쿠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이 시기 레버쿠젠은 에메르송, 루시우 페헤이라,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베른트 슈나이더, 옌스 노보트니, 제 호베르투 등 2000년대 명성을 날린 선수진용을 꾸렸고 발락 역시 이 선수단의 전술의 중심이 되면서 레버쿠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활약의 백미는 2001-02시즌. 발락은 이 시즌 리그에서만 17골을 때려박는 대활약을 펼치며 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상당한 상승세를 보였으나 막판 선수단의 줄 부상으로 결국 준우승으로 마무리하며 빈손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이 당시 발락은 선수 시절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었고 잘하면 트리플 크라운도 달성할 수 있었으나. 결국 노보트니등의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트리플 러너업을 달성하게 된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발락은 레버쿠젠을 떠나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게 된다. 전성기를 이어가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서 분데스리가 전체가 맛탱이가 간 상황이였다. 02-03시즌 바이언의 과도기로 UCL에서 광탈을 하게 되고 03-04 시즌엔 아예 무관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04-05 시즌과 05-06 시즌엔 분데스리가 우승과 포칼 우승 등 연속 더블 크라운을 달성하지만 UCL에서는 좀처럼 바이에른은 리그에서의 힘을 유럽 무대에서는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발락은 UCL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당시 신흥 강호로 떠오르는 첼시로 이적을 하게된다.

 

2006년 8월 27일 블랙번 로버스 전에서 발락은 프리미어 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삭발까지 하면서 첼시에서의 새 출발을 각오하지만 시즌 초기에는 적응기에 애를 먹으며 바이에른 시절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이는 05-06시즌까지 4-3-3을 즐겨 사용하면서 역습무쌍을 선보인 첼시가 4-4-2, 그러니까 투톱으로 시스템을 바꾸면서 혼선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미 기존의 램파드, 마켈렐레, 에시앙 등 중앙 미들진이 많은 첼시에 발라크까지 가세를 하는 상황이고 당시 발락을 포함한 네 선수들 중 나이가 있는 마켈렐레를 제외하면 백업으로 두기는 쉽지 않는 상황이었다. 시즌 초중반에는 이 전까지 팀의 중추역할을 담당했던 발락은 팀의 실질적 에이스인 램파드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전성기 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했다. 시즌 중후반부터는 살아난다 싶었는데 아쉽게도 뉴캐슬 원정에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시즌을 마감했다(이 부상은 07-08 시즌 초반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07-08 시즌부터 부상 회복 후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 홈 경기에서 부상당한 램파드를 대신해 투입된 이후로부터 램파드의 역할을 부여받고 팀의 중심이 되어 팀을 먹여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장 존 테리, 부주장 프랭크 램파드가 빠진 상황에서 캡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첼시에서의 50번째 경기였던 풀럼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 그리고 08년 4월 26일 리그 맨유전에서 선취골과 결승골을 기록하고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는 등 다음시즌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했다.

08-09 시즌 초반에는 잘 해주었으나 중반부터는 팀의 부진과 함께 큰 몫을 못해주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이 오자 팀에 완전히 적응하며 첼시 기계 축구의 중추가 된다.

특히 2009년 2월, 스콜라리 경질 후 거스 히딩크가 첼시에 오게되고, 히딩크는 에시앙-램파드-발락으로 이루어진 전설의 3미드진을 보여준다. 사실 아브람 그랜트(07-08 시즌 무리뉴 대행)가 먼저 에시앙-램파드-발락 조합을 선보였으나 에시앙은 마케렐레의 역할을 보여주기엔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히딩크 부임 후 히딩크가 발락과 에시앙의 역할을 재조정하면서 드디어 호흡이 맞아들어간 것이다. 어쨌든 이 중원 조합은 압도적인 피지컬과 제공권으로 상대팀의 중원을 그야말로 압살시켰는데 그 절정이 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 바르샤와의 4강전. 그 시즌 내내 괴물같은 포스를 보였던 바르샤가 그 2경기 만큼은 힘을 못썼다.

09-10 시즌 안첼로티 체제에서도 3미들(정확히 말하면 다이아몬드 4-4-2)의 중추로써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중반에는 팀이 좀 부진했는데 같이 부진, 그렇지만 후반기에는 다소 수비적인 룰을 맡음에도 불구하고 램파드, 말루다와 같이 안정적인 중원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시즌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2010년 5월 15일 포츠머스FC와의 FA컵 결승전에 선발 출전했던 발락은 전반 종료 직전 상대 선수인 케빈프린스 보아텡의 거친 태클에 무릎 부상을 입고 줄리아누 벨레티와 교체되어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아픔을 겪었다.

결국 이 부상으로 인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출전은 무산되었고 팀에서는 단기 재계약을 제시했으나 그는 더 많이 뛸 수 있는 팀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커리어는 서서히 황혼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2010년 여름일자로 레버쿠젠으로 이적을 했다. 당시 레버쿠젠은 직전 시즌 롤패스와 아직 성장중이던 토니 크로스를 중심으로 미들진의 전술을 짜였고, 크로스의 바이에른 복귀로 인해 34세의 노장인 발락은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맡게된다.

그러나 9월 하노버전에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며 전반기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만다. 그나마 다행히도 빠르게 재활하며 후반기 초에 복귀하는데에는 성공했다. 발락의 복귀 이후 레버쿠젠은 10승 2무 3패를 달리며 8승 4무 3패에 그친 도르트문트를 제치고 바이언과 함께 가장 많은 승점을 쓸어담았으나 이미 벌어졌던 11점의 승점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7점차로 도르트문트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2011-2012시즌 UCL에서 발렌시아 전과 행크전에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팀은(발락은 부상이라 출전을 못했다.) 16강에서 바르셀로나에게 1-7로 대패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유럽 클럽 대항전 무대를 쓸쓸히 마감한다.

 

당장의 2002 FIFA 월드컵 플레이오프에서 발락이 없었으면, 독일은 진작에 우크라이나에 밀려 예선탈락이라는 최악의 암흑기가 도래했을 것이다.
또한 발락 의존증을 줄이기 위해, 하노 발리치, 파비안 에른스트, 프랑크 바우만, 시몬 치우머 등 당시 분데스리가에 날고 기는 미드필더들을 투입하며 실험을 하였으나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2002년 월드컵 지역예선 9조에서 독일은 잉글랜드와의 1위 다툼에서 그 전설의 1-5 참사를 당하면서 플레이오프로 밀려나게 된다. 바로 이 때 부터 발락의 진가가 발휘되는데 플레이오프 상대는 우크라이나로 발라크는 1차전 0-1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동점골을 넣고 2차전 선제골, 추가골을 넣어 4-1 대승을 이끌며 독일을 탈락위기에서 구해내게 된다.

 

2005년 자국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올렸고 이 당시 독일 대표팀 역시 뒤늦게나마 4-2-2의 포지션을 확립하게 된다. 이 때 발락의 파트너로써는 토르스텐 프링스였고, 이 둘은 최적의 호흡을 보이며 UEFA 유로 2008때까지 파트너로 활약하게된다. 발락과 프링스는 넓은 활동량과 기동성을 자랑하였고, 특히 8강전인 아르헨티나 전에서 아르헨티나 미들진의 점유율 축구를 기동성으로 뭉게버리는 포스를 보여줬다.

이 시기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필립 람과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페어 메르테사커, 루카스 포돌스키 등 소위 1980년대생의 황금세대들이 포텐이 터진 시기인데 비록 2006년 30줄에 접어든 발락 역시 체력적인 저하가 일어났으나, UEFA 유로 2008에서도 여전한 팀의 전술의 핵으로 활동했다. 이는 요아힘 뢰프 감독이 모든 팀의 코어를 몰빵한 발락에 대한 과부하를 줄이기 위해, 토마스 히츨슈페르고, 지몬 롤페스, 사미 케디라를 원볼란치, 혹은 더블 볼란치로 두는 실험을 했다. 당시 뢰브 감독은 2007년 10월 체코와 홈경기에 발락을 제외하고 프링스, 슈바인슈타이거의 중원에 피오르트 트로초프스키, 다비드 오동코어의 좌우 윙을 두며 미드필더 라인을 구축했으나 결과는 0-3 완패를 당하면서 여전히 발락 없이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2010년 5월 FA컵 결승전에서 당한 부상으로 인해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되었고, 이후 그의 대표팀에서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2012년 10월 2일 자로 현역은퇴를 선언했다. 독일 축구의 암흑기를 거의 홀로 지키다시피 했고 2010년 독일축구의 새로운 세대를 시작하는 초석을 다진 위대한 거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활약한 선수 가운데 파트리크 비에라, 클라렌스 세도르프, 지우베르트 시우바, 제 호베르투, 에메르송, 스티븐 제라드와 함께 전술이해도가 뛰어난 선수로 꼽힌다. 말 그대로 만능이다. 그리고 재능 뿐만 아니라 실적 면에서도 뛰어났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페널티박스 밖에서의 묵직한 중거리 슛이다. 최고의 중거리 슈터를 꼽으라면 제라드, 스콜스, 램파드와 함께 최일선에 거론되는 인물이다. 또한 190cm 가까이 되는 큰 키를 이용한 헤더능력 역시 당대의 미드필더 중 최강이었다. 국가대표 커리어만 봐도 알겠지만, 98경기에 42골...왠만한 월드클래스 공격수에 준하는 기록이다. 동독 유스 시스템의 산물답게 왼발로도 좋은 퀄리티의 킥을 구사한다.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 등 모든 미드필더 위치에서 뛸 수 있는 선수. 전성기 때에는 대표팀이든 소속팀이든 그를 중심으로 전술이 짜였다. 괜히 그를 로타어 마테우스의 후계자로 부르는 것이 아니며, 전성기 시절엔 미드필드 플레이어 한정으로 루드 굴리트와 비슷한 포스를 보여준 선수라 보면 된다. 발락의 무시무시한 전성기가 더 오래 갔다면 마테우스와 동급의, 그러니까 역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발락에게는 미드필더들이 갖춰야할 패싱력과 강력한 슈팅력, 단단한 피지컬과 많은 활동량, 팀의 중심이 되는 컨트롤 타워 능력이 있었다. 뛰어난 대인 수비, 태클 실력은 덤. 전성기 시절에는 약점이 없는 선수라고 평가되었으며,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발락 혼자만 중원에 세워놔도 상대편 중원을 씹어 삼킬 정도였다. 그는 드리블을 화려하게 하는 선수는 아니었고, 사실 그럴 만큼 민첩하거나 빠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말 팀에 필요한 플레이를 했다. 시야가 넓고 판단이 빨라 볼을 끌다가 뺏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상대 선수를 제치는 데 힘을 들이지 않고, 다른 선수에게 패스를 내준 다음 자신의 적절한 위치를 찾아 들어간다. 이러한 유형의 선수들은 보통 피지컬적인 면에서 약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발락의 경우에는 마치 탱크같은 단단함을 갖춰 밀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정말 감독들이 좋아하는 스타일.


팀의 중심 역할은 물론, 다른 선수를 돕는 위치에서도 충분히 빛이 났다. 예를 들어, 첼시로 이적한 발락은 이전처럼 폭발적인 공격력을 보이거나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선 인물은 아니었지만, 팀 동료인 프랭크 램파드가 제대로 활약할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 주며 자신이 어느 위치에서든 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발락의 공격능력이 램파드 못지않다는 것을 생각했을때, 램파드보다 처진 위치에서 그와 균형을 맞추어 뛰라는 감독의 요구를 완벽에 가깝게 실행해 낸 발락은 정말 다재다능하다고 볼 수 있다.

 

발락에 대한 평가는 과거 올드 독일축구팬과 바이에른 뮌헨 팬들에겐 그야말로 암흑시대의 한 줄기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발락의 기량이 절정이던 시절은 레버쿠젠 시절과 바이에른 뮌헨 시절로 보면된다. 첼시 시절엔, 제한된 임무와 더불어 서른 줄이 넘긴 나이로, EPL 무대에서 포스를 발휘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08-09시즌 기계축구의 중추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도 했으며 09-10 시즌에도 서른 경기 이상 출전하는 등, 팀 전력의 중추였다.

여담으로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독일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토너먼트 16강전부터 준결승까지 한국에서 경기했는데, 한국 입국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꼭 와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인터뷰를 통해 차범근의 위엄이 재확인되었고, 한편으로는 '여기가 XX의 나라입니까?'라는 드립의 시초가 되었다.

 

발락 스페셜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