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Best player 에릭 칸토나 스페셜

에릭 칸토나 (Eric Cantona)

 

1966년 5월 24일

 

프랑스 부슈뒤론주 마르세유

 

188cm 88kg

 

프랑스 국적의 前 축구선수, NASL 뉴욕 코스모스의 구단주. 현역 시절 주포지션은 센터포워드.

발롱도르 3위, FWA 올해의 선수, PFA 올해의 선수, 프리미어리그 도움왕 2회 등을 수상할 정도로 당대 EPL 최고의 선수였으며 맨유 7번의 계승자. 맨유 역대 최고의 주장이자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던 선수.

당시까지 서로 으르렁대던 사이였던 잉글랜드-프랑스 사이에서, "영국인이 사랑한 프랑스인"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불세출의 플레이어. 맨유 팬들은 그를 일컬어 '올드 트래포드의 왕'이라고까지 한다. 그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이고 사르데냐, 이탈리아, 스페인 카탈루냐 혈통이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에 특출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이 17세에 AJ 오세르(정조국이 뛰었었던 팀)의 주전 멤버로 선발되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팬들은 17세의 소년이 필드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플레이에 열광했고 또 엄청난 기대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과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 부터 다른 법인가... 지금도 "칸토나"하면 떠오르는 XX 맞은 성격은 그때부터 이미 파릇파릇했다. 당시 팀의 주장이 정말 사소한 부탁으로 라커룸에 놓고 온 자신의 가방을 좀 가져다 달라고 하자, 어린 칸토나는 "니가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야?"라는 말과 함께 장렬한 한방을 날려주셨다.

오세르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이적 시장에 나온 탈유망주급 선수를 잡기 위해 프랑스 굴지의 클럽 올랭피크 마르세유가 나섰고 마침내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데 성공하지만... 베르나르 타피 당시 마르세유 회장은 훗날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후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며 땅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실력이야 두 말할 나위 없으나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성깔머리가 시도 때도 없이 뛰쳐나와 주셨기에 그야말로 골치덩어리 그 자체였다.

당시 자신을 호출하지 않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게 서슴없이 육두문자를 날려주는 바람에 1년 대표팀 경기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먹는다거나, 경기 중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유니폼 벗어 던지고 뛰쳐나가 3일간 행방불명되는 등 지금의 어느 애송이도 까불지 못할 정도의 망나니짓이 일상다반사 였으니.. 누구도 그를 종잡을 수 없었기에 팀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임대나 다니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결국 쫓겨나듯이 팔려간 님 올림피크 에서도 판정에 빡친 나머지 심판에게 장렬한 축구공 어택을 날려버린 사건으로 프랑스 축협은 거의 그를 매장시킬 분위기까지 치달았고, 칸토나 역시 축구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라며 은퇴를 결심한다.

여기서 그 탁월한 재능이 본인의 불같은 성질머리 때문에, 묻혀갖고 피지도 못할 것이 안타까워 미셸 플라티니가 직접 나서서 에릭 칸토나에게, 프랑스를 떠나 잉글랜드에 진출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해준다. 그래도 축구에 대한 열정은 남아있던 것인지 칸토나는 선뜻 잉글랜드 행 비행기에 올랐고, 축구 종가에서의 그의 첫 도착지는 리즈 유나이티드였다. 그리고 리즈 유나이티드는 진짜로 리즈 시절을 맞이했다! 칸토나의 이적 후 첫 시즌이었던 1991-92 시즌 리즈 유나이티드는 1부 리그에서 우승을 했던 것!


그래도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기에, 리즈 유나이티드에서도 칸토나는 A급 이상의 활약을 선보여서 팀의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에 큰 도움을 주었고, 리버풀과의 커뮤니티 실드에서는 해트트릭을 질러주는 등 그 재능을 잉글랜드 전역에 알렸다.


허나 또 그 성깔머리가 문제가 되어 하워드 월킨슨 당시 감독과 대판 싸우게 되었고, "이 놈을 어떻게 제거하나?" 하고 골치를 썩이던 하워드 윌킨슨 감독은 알렉스 퍼거슨과의 전화 통화로 칸토나를 "120만 파운드"라는 헐값에 팔아넘긴다. 이때 리즈 유나이티드의 팬들은 뛰어난 선수였던 칸토나를 파는 것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후는 다들 아시다시피...

 

지난 시즌 리즈에게 리그 1위를 넘겨준 맨유는 칸토나의 합류와 동시에 리그 1위 자리를 빼앗았고, 그다음 시즌에는 FA컵까지 동시에 재패하는 시즌 더블을 기록함과 동시에 칸토나는 팀 내 최다골을 기록해 주었다. 그러한 활약이 너무도 뛰어났기에 1994년 PFA 올해의 선수 수상은 당연히 칸토나의 몫이었다. 신기하게도 당시까지 별다른 기행은 없었고, 이는 지금도 확연히 드러나는 퍼거슨 감독의 선수 장악력이 아주 제대로 먹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1995년 1월,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에서 상대선수에게 주먹감자를 날리는 바람에 레드카드를 받고 이젠 익숙하게 벤치로 향하던 중, 하필이면 그의 눈에 자신을 대놓고 야유하는 상대팀 서포터 매슈 시먼스(당시 20세)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칸토나는!!!

곧바로 시먼스에게 날아차기 한 방을 먹였다.

이는 지금도 간간이 회자되는 "쿵푸 킥" 사건이었고, 칸토나는 9개월 출장 정지라는 그야말로 중징계를 먹었다. 더불어 이 사건 직후의 기자회견에서는 "갈매기가 고깃배를 따라오는 이유는 어부들이 정어리를 바다에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는 황당한 드립을 쳐서 기자들도 당황했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도 있다' 라는 의미로 한 말이겠지만 그걸 저 상황에서 말했다는 것이... 사실 원인으로만 보자면 칸토나 본인이 상대 선수에게 과격한 행동을 함으로서 상대편 관중들을 자극한 점이 먼저긴 하다.

너무나도 심각한 사건이었기에 여론은 "9개월로는 부족하다. 아예 축구를 못하게 막아버려라"라는 지경까지 치닫았는데, 놀랍게도 천하의 알렉스 퍼거슨이 직접 나서서 칸토나를 두둔해주는 진풍경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때는 퍼거슨도 칸토나를 포기하려고 했으나, 아내 캐시의 만류로 생각을 바꾸어 그를 남기기로 했던 것이다. 멘탈이 글러먹었거나, 팀 전술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를 가차없이 내치는 퍼거슨 감독이 직접 총대를 메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자, 은퇴를 시사하던 칸토나도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9개월의 공백기 동안 인터밀란이 적극적으로 칸토나를 영입하려 애썼으나, 이 때 칸토나는 그 유명한 "나는 맨체스터에 뼈를 묻겠다"라는 한 마디만을 남겨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정말로 맨유에서 은퇴를 했다.

칸토나가 빠진 94-95시즌의 9개월동안 맨유는 결국 리그 우승을 블랙번 로버스에게 빼앗기고, FA 컵 우승은 에버턴에게 빼앗기는 등 한끗발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칸토나가 복귀하자마자 다시금 시즌 더블을 기록한다. FA 컵 결승전에서의 결승골을 기록한 것도 칸토나였으니 맨유 팬들이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과연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그 때문일까, 퍼거슨은 1996-97 시즌부터는 아예 칸토나에게 주장 완장을 달아버린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클럽 역사상 최초의 비영국인 주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해당 시즌에도 칸토나와 함께 한 맨유는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리그 우승을 되찾으면서 다시 한 번 우승 트로피를 높이 치켜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척 보기에 둔중한 몸집과 떡대로 인해 타겟형 스트라이커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칸토나는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테크니션이었고 그 플레이스타일은 오히려 세컨드 스트라이커에 가까웠다. 붉은 유니폼을 입고 찍은 스탯이 182경기 82골 66어시였음을 명시해보면 득점은 물론이고 어시스트까지 완벽했다는 뜻이다. 전통적인 최전방 공격수와 플레이메이커 포지션에서의 플레이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선수였다. 물론 명성에 비해, 또 비슷한 클래스(라 여겨지는)의 선수들에 비해 부족한 스탯임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롱도르 3위를 할 정도였던 이유는 그의 해결사 능력 덕분이다.


리즈 유나이티드 첫 시즌에 리즈를 17년 만에 리그 우승시킨 것과 맨유에서의 5시즌 중 4시즌을 우승시킨 것이 그 증거. 그 중 두번이 더블이요, 챔피언스리그 4강도 올려보냈다. 챔스 4강 한번이 왜 중요한 것이냐면 당시 EPL은 헤이젤 참사로 받은 징계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로 출범해서 모든 EPL 팀들의 유럽대항전 성적이 낮았다. 그런 맨유가, 즉 EPL이 챔스에서 재기하는데의 큰 역할을 한 것. 당시 긱스를 제외한 퍼기의 아이들이 모두 불완전한 상태인 걸 감안하면 더욱 대단하다. 경기력에서도 해결사 기질이 빛을 발했다. 대표적인 것이 복귀전인 리버풀전 득점과 FA컵 리버풀전 득점 등 더비나 빅매치에서의 중요한 골을 넣었다. 당시 맨유팬들은 결승골이나 역전골이 터지면 누군지 묻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칸토나일 테니까.

 

지금의 웨인 루니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EPL 출범과 동시에 호흡을 맞춘 라이언 긱스와 이때부터 완벽한 짝짜꿍을 선보였으며, 긱스가 왼쪽을 초토화시킨 후 칸토나에게 어떻게든 공을 넘겨주면 칸토나는 다시 최전방을 초토화시키고 골을 때려넣었다.

 

 

 

에릭 칸토나 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