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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Player

Best player 데이비드 베컴 스페셜

데이비드 베컴

(David Robert Joseph Beckham)

 

국적 영국

 

출생 1975년 5월 2일

 

키 180cm 체중 75kg 혈액형 O형

잉글랜드의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윙어이다.

본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뛰어난 축구 실력과 조각같은 외모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고, 세계적인 걸그룹 스파이스걸스의 멤버인 빅토리아 베컴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까지 꾸린 인생의 승리자.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오랜 기간을 뛰며 주장까지 역임한 핵심 선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는 1998-99 시즌에 역사적인 트레블을 달성했으며,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는 갈락티코스에 합류하여 그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유럽을 떠나 미국에서 뛰면서 미국의 MLS 붐을 주도했다.

 

베컴은 맨유 유스팀의 일원이 되어 팀을 이끌었고 92년 5월 잉글랜드 FA 유스컵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퍼거슨 감독에게 눈도장을 찍게된다.

이후 베컴은 93년 5월이 되어서 맨유 퍼스트 팀으로 승격해 가끔씩 출전 기회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맨유는 매 시즌 우승을 노리는 강팀이었다. 아무리 유스팀에서 날고 기었던 베컴이었다해도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 있다는 맨유에서 그가 주전을 차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렇듯 퍼스트 팀 승격 이후, 경기에 결장하는 것이 잦아졌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좌절감에 몸부림쳤다 .그런 베컴을 본 퍼거슨 감독도 베컴의 재능이 썩는 데에 아쉬워했다. 결국 94-95 시즌에 베컴은 당시 리그 2 소속이었던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라는 팀으로 임대되었다. 프레스턴은 베컴을 주전 선수로 출전시켜줬고, 이는 그가 다시금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프레스턴에서의 경험으로 5경기 2골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임대 2달차가 되던 때에 맨유의 갑작스러운 복귀 요청으로 다시 맨유로 복귀했다. 주전 선수들이 모두 부상으로 쓰러진 것이었다.이에 퍼거슨 감독은 급히 프레스턴으로 임대가 있던 베컴을 불러들였고, 급한대로 그를 오른쪽 윙 플레이어로써 출전시킨다.


맨유에 복귀한 베컴은 어린 나이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킥력을 선보였고, 자신의 이름을 잉글랜드 전역에 각인시켰다. 그는 96/97 시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윔블던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골키퍼 설리반을 농락시키는 그 유명한 60야드짜리 초장거리슛을 성공시키면서 베컴은 어느덧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잉글랜드의 미래를 이끌어 갈 대표적인 기대주로 손꼽히게 되었다. 특히 97년 2월, 첼시와의 경기에서 터뜨린 대포알같은 중거리포는 유럽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의 오른발을 떠나 골문을 향해 무시무시한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볼은 눈깜짝할 사이에 득점으로 연결됐고, 그 시속이 무려 97.9마일(약 157km)로 측정되었다. 이쯤되면 야구에서도 '강속구'가 아닌,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의 직구 스피드에 버금가는 수치라 할만했다.

 

베컴의 활약에 힘입은 맨유는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 이후, 시즌이 끝나자 몇몇 스타 선수들이 이적해버리고, 퍼거슨 감독은 영입 대신 유스 출신선수들을 기용할 것을 결정, 이에 대해 영국 언론과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구단의 유스시스템에 확신에 차 있었다. 베컴 역시 그런 퍼거슨 감독의 신뢰에 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한 이적시장을 보내고, 시즌이 시작되었다. 시즌이 시작되자 베컴을 필두로 맨유는 예상을 뒤엎고 6연승을 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기량을 과시했다. 베컴을 비롯한 맨유의 유스팀 선수들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이자 언론들은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거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매 경기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맨유의 아이들, 이른 바 '퍼거슨의 아이들'은 그렇게 등장했다.

맨유에서 계속해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1997년, 칸토나의 갑작스런 은퇴 결정으로 인해 많은 맨유팬들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베컴에게 7번을 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고, 베컴 역시 7번 유니폼을 입고 이곳저곳 누비며 그 신뢰에 보답하며 결국 98-99 시즌 맨유 역사상 프리미어리그, FA 컵, 챔피언스리그 모두 우승하는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구단 최초의 트레블의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에도 베컴은 세트피스, 프리킥, 페널티킥 등으로 수많은 골들을 양산하며 잉글랜드 최고의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로 자리매김했다. 베컴의 존재는 맨유를 세계적인 인기 클럽으로 만들어줬다.

 

부상 전엔 환상적인 킥력 외에 돌파도 준수했는데 베컴은 맨유의 명실상부한 에이스로서 모습을 보였다. 다이내믹한 윙어의 최고봉이었던 라이언 긱스의 왼쪽과 후방에서 활동량과 로빙 패스로 받쳐 주는 베컴의 오른쪽은 한 시대를 풍미한 좌우 날개 조합이었다.


1997-98 시즌부터 2000-01 시즌 사이에 3번의 리그 도움왕에 올맀고, 맨유 시절 도움 해트트릭만 9회나 기록하며 공격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1998-99 시즌에는 팀의 트레블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에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 2위, 그리고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이때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가져간 선수가 다름 아닌 브라질의 히바우두였는데, 팀 커리어로는 맨유의 베컴이 압도적이었지만 포지션의 차이나 팀에서의 입지, 개인이 보여준 퍼포먼스 등의 차이로 베컴이 아깝게 놓쳤다. 이러한 결과는 과거에는 프란츠 베켄바워, 후에는 베슬리 스네이더르와 프랑크 리베리 등이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었었다.

 

그러다가 2002년 4월 10일, 베컴은 데포르티보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왼발의 제2 중족골 부상을 당했다. 이 부상으로 베컴은 시즌 남은 기간 동안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경기를 치르지 못했고, 프리미어리그를 아스널에게 내주었지만, 추가 급여와 초상권 등과 관련해 구단과의 몇 달에 걸친 협상 끝에 5월에 3년 연장 계약을 맺었다. 새 계약을 맺어 다수의 협찬 계약으로 벌어들이는 수입과 합쳐, 베컴은 세계에서 최고 주급을 받는 선수로 등극했다. 또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2001-02 시즌은 베컴이 유나이티드 선수로 치른 최고의 시즌이었다. 베컴은 리그에서 28경기를 치루면서 11골을 넣었고, 모든 경기를 통틀어 42경기에서 16골을 넣었는데, 이는 개인 최고 기록이었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저 부상으로 인하여 드리블 돌파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2002-03 시즌 초에 부상을 당한 후, 베컴은 주전 오른쪽 미드필더로서의 입지를 유지하기 힘들어졌으며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베컴을 대신하여 우측 미드필더 보직을 꿰찼다. 물론 부상 복귀 후에는 베컴이 다시 오른쪽 미드필더 주전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그런데 2003년 2월 15일, FA컵에서 아스날에게 패배한 뒤 알렉스 퍼거슨과 라커룸에서 충돌, 결국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상황을 서술하자면, 경기에서 패배한 후 라커룸에서 알렉스 퍼거슨이 데이비드 베컴에게 "플레이가 이게 뭐냐. 애슐리 콜에게 완전히 발렸잖아."는 식으로 호통을 쳤는데, 발끈한 베컴이 "영감님은 아르센 벵거에게 완전히 발려버렸고요."는 식으로 맞받아치자 열받은 퍼거슨이 축구화를 발로 차버렸다. 그런데 그게 우연히 베컴의 얼굴을 직격해서 눈썹 위가 찢어졌다. 폭발한 베컴이 퍼거슨에게 달려들었으나 팀메이트들이 엉겨붙어 간신히 떼놓았다고. 이러한 자초지종이 베컴의 아내 빅토리아 베컴에 의해 언론에 새어나가고, 이후 베컴도 보란 듯이 눈 위에 반창고를 붙이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파파라치에 의해 언론을 타면서 둘 사이는 봉합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시즌 종료 이후 베컴은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번에 퍼거슨의 2번째 자서전에서 퍼거슨이 밝히길 베컴이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훈련을 할 때 베컴이 비니를 쓰는 모습을 보고 (비니를) 벗으라고 했는데 무시한 것부터 시작해서 밑에도 나와 있듯이 빅토리아와의 사랑에 빠지거나 하는 등 축구에 소홀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에게 실망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축구에 더 집중했다면 자기가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도 맨유에 남아있었을 것, 정말로 축구 자체에 헌신했다면 레알 마드리드에서 로스앤젤레스 갤럭시로 이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성토했다. 물론 베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저런 축구 외적인 잡음들을 매우 싫어했던 퍼거슨과 이런 크고 작은 갈등이 쌓이고 쌓여 결국 2003년 축구화 사건이 터지면서 파국을 맞게 되었다. 현재는 시간이 흐르면서 위의 사진에서 보이듯이 당시의 앙금이 가라앉으면서 화해했다.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레알 마드리드 CF 전에서도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었고, 팀은 합산점수에서 밀려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나 베컴은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넣었고, 이후 문전 혼전 상황에서 볼을 밀어넣으며 2차전 경기만큼은 4-3 승리로 끌었다. 자신의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준 경기였다.

어쨌든 축구화 사건 이후로 팀에서 경기 출전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베컴은 이 시즌에 모든 대회를 통틀어 52경기에 출전해 11골을 기록했다. 또한 여전히 잉글랜드의 주전 현역 선수였지만, 축구에 대한 공로로 2003년 6월 13일에 영국 제국 금강 기사단 장교 훈장 (OBE) 을 받았다.

 

베컴은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265번의 프리미어 리그 경기에 출전해 61골을 넣었으며, 81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에도 출전해 15골을 기록했다. 베컴은 12년의 기간 동안 프리미어 리그를 6번, FA컵을 2번, UEFA 챔피언스 리그를 1번, 인터컨티넨탈컵을 1번, 그리고 FA 유스컵을 1번 우승했다. 이 시기에, 그는 라이언 긱스에 이어 두 번째로 최장 기간 활약한 선수였다.


여담으로 베컴은 맨유의 7번으로 너무 유명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7번은 베컴이 클럽에 입단한 이래 네 번째로 부여받은 등번호였다. 그는 데뷔시즌 28번을 입었었고, 그 후 1995/96시즌부터 24번으로 바꾸며 정규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96/1997시즌부터 10번으로 번호가 승격되었는데, 바로 마크 휴즈가 달던 번호였다. 하지만 1년 후 테디 셰링엄이 맨유에 합류하고 에릭 칸토나의 충격적인 은퇴발표가 있은 후, 베컴은 자신의 등번호 10번을 셰링엄에 양보하고, 맨유에서의 나머지 생활을 7번 번호를 계승해 달고 뛰며 맨유의 상징적인 슈퍼스타가 되었다.

 

 

 

 

2003년 여름 이적 시장이 다가오면서, 맨유는 베컴을 처음에 바르셀로나로 팔 것이 유력해 보였고, 두 구단은 베컴의 이적을 놓고 합의를 본 것으로 발표까지 했지만, 예상을 깨고 레알 마드리드와 €35M에 4년 계약을 맺고 둥지로 옮겼다. 베컴은 플로렌티노 페레스의 갈락티코 1기 때 영입한 세계구급 거물들 중 한 명이었다. 비록 6월 중순에 발표가 났지만, 이적은 2003년 7월 1일에 완료되었고, 베컴은 로리 커닝엄과 스티브 맥마나만에 이어 레알 마드리드의 일원이 된 세 번째 잉글랜드 선수였다.

 

최고의 스타성과 상품성을 가진 데이비드 베컴이 화려한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갈락티코스 1기의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자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베컴은 클럽과 대표팀에서 7번을 달았으나, 레알 마드리드의 7번은 레전드 라울 곤살레스이기에 23번을 달았고, 이후 23번은 베컴의 상징이 된다. 그러나 본래 포지션인 오른쪽 윙어에는 포르투갈의 전설적인 윙어 루이스 피구가 존재했기에 중복된 포지션으로 인해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된다. 익숙치 않은 포지션에서 활약하면서, 게다가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클로드 마켈렐레가 떠난 상태이기에 더욱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사실 베컴도 부상으로 인해 돌파 능력을 잃었고 맨유 시절에 비해 확실히 기량이 쇠퇴했다.

당시 갈락티코스 1기의 레알 마드리드는 모래알 조직력과 구멍난 수비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다. 수많은 감독들이 경질되었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라는 소리를 듣게된다. 엄청난 이적료를 주고 영입한 베컴이 아쉬운 활약을 펼치자 스페인의 언론들은 그를 비난하는 기사를 써내려갔고, 더 자극적인 가십을 써 내려가기 위해 베컴의 사생활 취재에 집중하며 기자와의 몸싸움을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베컴의 레알 마드리드 진출은 실패로 끝나는 듯 싶었지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그 적응에 완전히 성공해 루이스 피구를 인테르로 이적시키고 원래 자리인 오른쪽 윙어 자리를 되찾았다.


이 시기 레알 마드리드는 02-03 시즌의 리그 우승 이후 세 시즌 째 무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승청부사라 불리던 파비오 카펠로가 06-07 시즌 감독으로 선임되지만, 이는 베컴에게 재앙으로 작용한다. 카펠로는 언론을 통해 대놓고 베컴을 중용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베컴은 힘든 시간을 거치다가 시즌 종료 후 LA 갤럭시로 이적을 할 것을 밝히게 된다.

 

그러나 반전이 시작된다. 베컴처럼 퍼거슨과의 불화 때문에 레알로 이적하게된 뤼트 판니스텔로이는 이적시즌인 06-07 시즌 초반에는 다소 부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점점 팀에 적응하게되고 이는 택배 크로스 전문가인 베컴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호재였다. 언론을 통해 대놓고 베컴을 디스하던 카펠로도 일단 리그 순위가 간당간당하다보니 당장 반니에게 질높은 크로스 배달을 잘하는 베컴을 안 쓸 수가 없었고, 06-07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초반에는 위태위태한 출발을 하였으나 막판에 대폭발한 반니스텔로이-라울 투톱에 이를 보조하는 베컴의 엄청난 활약으로 대역전 우승을 하게 된다.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우승청부사의 명성을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시즌 종료 후 경질당하게 되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레알 마드리드답지 않은 축구를 했다" 라는 이유였으나, 실은 "당신이 필요없다던 베컴의 활약으로 우승해놓고 그게 어떻게 당신 능력임?" 이라는 뉘앙스가 강했다. 그만큼 해당 시즌의 베컴은 대단했고, 베컴의 택배 수취 전문인 판 니스텔로이는 라리가 데뷔 시즌에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베컴의 레알 마드리드 생활은 라리가 우승으로 마무리한다.

 

이적 이후 LA 갤럭시의 간판 스타로 활약. 하지만 이적 당시 갤럭시 구단은 비난을 많이 받았다. 아직은 야구나 농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에 절대적으로 밀리는 메이저사커 리그에서 베컴이 받은 돈은 다른 팀 동료들이 받는 돈을 다 합치고도 남는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시즌이 끝날때 쯤이면 AC 밀란으로 임대와서 뛰기도 했다. 밀란의 감독이었던 카를로 안첼로티는 베컴을 굉장히 아까운 인재로 여겼는데, 안첼로티는 베컴은 미드필더로서 투쟁심, 활동량, 수비력, 축구지능, 킥력 등 미드필더에 필요한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맨유에서 플레이 스타일을 한정짓는 바람에 재능만큼 꽃피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특유의 정확한 크로스에 노련미 넘치는 플레이까지 더해지며 밀란의 미드필드에 활력을 불어넣는 쏠쏠한 활약을 펼친다. 밀란의 팬들은 베컴의 활약에 매우 만족해했고, 베컴 역시 밀라노의 생활을 즐겼다.

 

2010년, 안첼로티가 떠난 밀란에 임대 이적했을 때에는 절묘하게도 밀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챔피언스리그에서 대결하면서 처음으로 올드 트래포드에 서게 되었는데 비록 선발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교체로 투입될 때 전 관중이 기립박수로 환대해줬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팬들이 건네 준 노란색/녹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퇴장하며 더 큰 환호를 받았다. 다만 그 스카프는 그 당시 경기장에서 구단주에 대한 항의 시위를 이어가던 팬들의 상징이라서 약간 논란이 있었다. 베컴 본인은 시위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그저 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는 듯. 그러나 2010년 시즌에 밀란에서의 최종전에서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면서 2010년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었다. 기량이 예전만 못하다거나 세간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졌다고 해도 베컴은 여전히 잉글랜드 국대 캡틴급의 위상을 가진 인물이었던 데다, 베컴 없이 치르는 국제 대회는 참 오랜만이었기에 잉글랜드 축구팬들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사이 겨울이적시장에서 토트넘에서 영입제의를 했으나 거절했다. 맨유 외의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뛰지 않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일단 2012년 12월에 열리는 MLS컵 결승을 마지막 무대로 퇴단 절차를 밟고 있다.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가려는 의욕을 보이고 있는데 아직 차기 행선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 다만 현지 언론에 따르면 중동으로 팀을 옮겨 마지막 축구 인생을 불사르리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미러, 피플 등에서) 현재 유력한 행선지로 꼽히는 곳은 카타르의 알 사드, UAE의 알 와슬 등이며 프랑스의 모나코나 PSG도 관심이 있다는 설이 있다. QPR의 레드냅 감독도 토튼햄 감독하던 시절부터 계속해서 베컴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지만 베컴은 맨유가 아닌 프리미어리그 팀에서 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면서 계속 거절했다.

2008/09 시즌과 2009/10 시즌 겨울 기간에 임대로 와서 AC밀란에서 활약을 한 것에 대해 밀란 팬들은 긍정적이지만 정작 LA갤럭시와 MLS팬들은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다. 휴식을 취해야 할 기간에 임대로 가서 활동하는 바람에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기고 덤으로 부상까지 달고 왔기 때문. 2008/09 세리에 A에서는 짧은 기간에 18경기나 출전했지만 그 여파로 정작 2009 MLS에서는 11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게다가 2009/10시즌 다시 세리에 A에서 겨울기간 임대가서 11경기에 출전했지만 2010 MLS에서는 또 그 여파로 7경기밖에 뛰지 못한게 그 예이다.

 

그렇게 차후 행선지를 저울질하며 입단 타진을 하고 있던 중 아스널 선수들과 같이 훈련을 하게 됐는데, 언론에서는 베컴이 아스날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는 기사를 써댔다. 베컴은 아스날 그리고 아르센 벵거 감독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MLS가 쉬는 겨울마다 아스날에 합류해 훈련을 해왔지만, 맨유의 서포터이자 레전드로서 맨유의 라이벌인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을 수는 없기에 아스날 입단설을 일축했다. 아르센 벵거 감독 역시 베컴은 아스날에 몸을 만드는 중이며, 아스날은 베컴에게 이러한 편의를 제공할 뿐이라고 입단설을 부인했다. 그리고 베컴은 자신 대신 아들인 로미오를 아스날의 유스팀에 입단 시키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신흥 강호로 떠오르는 파리 생제르맹 FC 입단한다는 기사가 떴다.

 

PSG는 1일(이하 한국시각)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베컴과 올해 6월 30일까지 계약을 했다"고 공식발표했다. 연봉 등 구체적인 계약 조건은 밝히지 않았으나, 주급은 15만 파운드(약 2억5000만원) 수준이며 5개월 이후 1년 계약 연장을 하는 조건이 첨부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젠 파리에서 택배크로스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베컴의 실제 연봉은 0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베컴은 PSG 입단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5개월치 주급 전부를 어린이를 위한 자선사업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베컴의 계약 조건은 일단 6월 30일까지 5개월 계약한 뒤 이후 1년 계약 연장 여부를 논의하는 방식이다. 베컴은 첫 5개월의 급여를 모두 기부하겠다는 뜻이다. 박찬호가 국내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2012 시즌 연봉을 모두 기부한 것과 닮았다. 베컴의 5개월치 급여는 50억원이 넘을 전망이다.

2013년 2월 24일, 베컴은 마르세유와의 리그 1 홈 경기에서 76분에 교체로 들어가 파리 생제르맹 데뷔전을 치렀다. 그에 따라, 베컴은 psg의 400번째 출전 선수로 기록되었다.

 

이후 5월 12일, 베컴은 파리 생제르맹이 리옹을 상대로 1-0 으로 이기면서 리그 1 우승을 확정지었으며 4개국 1부 리그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 은퇴 발표 후 이틀 뒤인 5월 18일, 베컴은 브레스투아와의 리그 최종전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를 뛰었다. 이 경기에서, 베컴은 마튀이디의 골을 코너킥으로 어시스트하였으며, 80분 동안 경기장을 누비다가 교체되어 나갔는데, 동료 선수들과 감독과 포옹했고, 서포터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한편, 파리 생제르맹은 이 경기에서 3-1로 이겼다.

 

베컴 플레이스타일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정확한 킥을 통한 패스 보급이 베컴의 가장 큰 장점이다. 오른쪽 윙어로 뛸 경우 크로스가, 중앙 미드필더로 뛸 경우 이리저리 뿌려주는 칼같은 로빙 패스가 일품. 주력과 민첩성, 수비 스킬이나 공격에서의 테크닉은 비슷한 시기의 선수들과 비교하면 특출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떨어지는 않는 편.

이미지나 외모, 장기인 킥력을 위주로 할 것 같은 스타일과 안 어울리게 굉장히 많이 뛰는 하드워커라는 점도 특징이다. 딴 건 몰라도 그렇게 빠른 공수전환의 뻥축구가 대세였던 EPL에서 활동하는 윙 플레이어가 활동량이 적은 게으른 선수였다면 천하의 퍼거슨 감독이 베컴을 에이스로 믿고 중용하기는커녕 진작에 짤렸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지역예선 최종전 대 그리스전에서는 팀 동료들이 실망스러운 경기력으로 일관할 때 무려 16.1km를 뛰면서 코너킥 어시스트에 이어 95분에 극적인 프리킥 골을 터뜨리며 2-2 무승부를 견인, 거의 혼자 힘으로 팀을 월드컵으로 보내다시피 했다. 참고로 카가와 신지의 맨유 소속 시절 에피소드 중 맨유의 셔틀 런 역대 최고기록 보유자가 베컴이라는 언급이 있다.

넓은 활동반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는데, 주로 오른쪽 미드필더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엔 풀백으로도 두 경기 출전하였으며 레알 마드리드 이적 이후엔 중앙 미드필더와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뛰었다. 다만 오른쪽 미드필더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고, 이 때문에 4-4-2 포메이션에만 한정된 선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킥력과 날카로운 프리킥 능력은, 본선진출도 위태위태했던 잉글랜드 국대의 리썰 웨폰으로 베컴의 국대 커리어 내내 따라다녔다. 특히, 프리킥은 그의 상징과도 같은데 비스듬한 위치에서 대각선으로 도움닫기를 하여 감아찬 공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골대에 빨려 들어가는 장면은 베컴의 클리셰라고 봐도 무방하다. 특이한 점이라면 다른 최상위 프리키커는 거리와 위치에 따라서 킥의 구종에 변화를 주지만 베컴은 어느 위치에서든지 늘 똑같이 감아차는 킥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사실 킥의 정확도야 본인의 인프런트가 정확할 것이고 워낙에 발목 힘이 좋다보니 감아차기를 해도 다른 선수들의 묵직한 파워 슛만큼 힘이 실려있기 때문에 굳이 다른 방식의 킥을 구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역대 최고의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를 논할때 주니뉴 페르남부카누, 지쿠 등과 함께 반드시 언급된다.

킥의 정확도도 정확도지만, 수비를 앞에 두고도 여유 있게 로빙 패스가 가능하다는 점도 베컴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일반적인 윙어들이 마크를 뿌리치고 공격수에게 크로스 한번을 올리기 위해서 드리블하는 것을 생각하면, 마크를 앞에 두고도 정확하고 여유있게 올리는 베컴의 크로스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윙어들은 어느정도 상대 페널티박스 근처까지는 올라와서 크로스를 올리는것이 보통이지만, 베컴은 거의 중앙선 근처에서 뜬금없이 공격수를 바라보고 크로스를 올리기 때문에 마크하는 상대 입장에서도 대처가 힘들다. 물론 베컴이라고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특정 상황에서 가능하다는 것만 해도 가공할 수준이다.


롱킥을 할 때 뛰어난 발목힘을 이용해 양팔을 아래 위로 휘저어 킥력을 올리면서도 밸런스를 잡는 특유의 폼은 그만의 전유물이다. 또한 베컴은 그의 킥에서 커브와 자세로 많이 유명하고 매번 강한 파워의 슈팅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경악스런 힘의 슈팅을 보여줄 수 있는 발목을 가지고 있었다. 베컴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빠른 슈팅 10위 이내 기록을 2개나 가진 유일한 선수며, 1997년 맨유vs첼시 경기에선 157.5 km/h 슈팅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엄청난 하드워커로 전성기 맨유 시절에는 리그 경기당 평균 뛴 거리가 14km라는 말도 안 되는 활동량을 기록했던 적도 있다. 다만 2002년 말 부상 여파로 인해 운동능력 저하가 왔는지, 이후에는 플레이 스타일이 약간 변화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라 리가에서는 많이 뛴다는 소리를 들으며 팀에서는 높은 활동량 기록을 보여줬던 베컴이었지만, 전성기 맨유 시절에는 정말로 오른쪽 사이드의 끝에서 끝까지 그리고 중앙까지도 너끈하게 커버하면서 뛰어다니는 미친 하드워커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주로 윙어로 뛰던 맨유 시절과 달리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했기에 그동안의 킥 스루 패스 스타일보다 경기장을 휘젓는 엄청난 활동량이 부각되어 그 해 라리가에서 제일 많이 뛰어다닌 선수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라 리가에서는 경기력에 대한 비난도 많이 받아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부상으로 인한 운동능력 저하와 더불어 제대로 된 수비형 미드필더가 없던 갈락티코의 사정 때문이었다. 또 라 리가에 진출한 잉글랜드 선수들이 흔히 겪는 어려움 중 하나인데 느려진 템포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AC 밀란에서는 안첼로티 감독이 있을 때는 주 포지션인 윙어에 가까운 플레이(중앙 미드필더이긴 하지만)를 하였지만, 레오나르도 감독 아래에서는 전술적 이유로 윙어로 출장했다. 하지만 라이트백으로 출장하는 이냐치오 아바테의 수비력이 개판 오분전인 관계로 윙어가 활발한 수비가담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기도 했다.

단점은 속도가 정상급 윙어보다 느리고 온 더 볼이 아주 뛰어난 편이 아니라 전술적인 제약이 심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윙포워드로서 부적합해 4-3-3이나 4-2-3-1 등의 포메이션에서 윙어로서 활약은 미미했다. 또한 수비가담이 좋긴 하지만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뛸 정도는 아니며 탈압박이나 드리블이 특출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중앙 미드필더 자리도 소화는 가능했으나 레알 마드리드 급의 세계적인 클럽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아마 베컴이 조금 더 늦게 태어나서 2020년에도 축구를 하는 선수였더라면, 윙백 포지션으로 내려가서 플레이하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베컴 개인수상이력

 

 

  • 발롱도르 2위: 1999

  • FIFA 올해의 선수 2위: 1999, 2001

  •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1998-99

  • UEFA 올해의 미드필더: 1998-99

  • UEFA 올해의 팀: 2001, 2003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1996년 8월

  • 프리미어 리그 도움왕: 1997-98, 1999-2000, 2000-01

  •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베스트 XI (1992~2002)

  •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최고의 골: 1996년 8월 17일 윔블던 FC 전

  •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 1996-97

  • PFA 올해의 팀: 1996-97, 1997-98, 1998-99, 1999-2000

  • PFA 세기의 팀: 2007

  • FWA 공로상: 2008

  • MLS 최우수 선수: 2008, 2012

  • MLS 올해의 컴백 플레이어상: 2011

  • ESPY 어워즈 최고의 남자 축구 선수: 2004

  • FIFA 100: 2004

  • 맷 버스비 경 올해의 선수: 1996-97

  • FA 잉글랜드 올해의 선수: 2003

  • 레알 마드리드 올해의 선수: 2005-06

  • UEFA 회장상: 2018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8

  • AC 밀란 명예의 전당: 2017

  • BBC 올해의 운동 선수: 2001

  • ESM 올해의 팀: 1998-99

  • IFFHS 레전드: 2017

  • 타임 100: 2008

 

 

데이비드 베컴은 신이 내린 재능이어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재능이 덜한 선수들이 발상해내지 못하는 응용력을 가진 채로 쉬지 않고 연습하기 때문에 영국의 최고 공격 자원이다.

-알렉스 퍼거슨

 

베컴은 전통적인 축구의 개념을 뛰어넘었다. 쇼비즈니스의 중심에 서있다. 안나쿠르니코바와는 달리 베컴은 경기장 안에서 쇼를 펼친다.

-마르셀 드사이

 

베컴의 DNA에는 프리킥 본능이 있다. 그는 세계 최고의 프리키커다.

-스벤예란 에릭손

 

선수들로부터 리더로 존경받는 베컴, 더 이상 증명할 게 없다.

-펠레

 

내가 본 최고의 크로스를 하는 선수는 베컴이다.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베컴의 발에 잉글랜드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프란츠 베켄바워

 

베컴은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그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열광했다. 축구와 다른 영역에서 모두 최고가 된 베컴을 열망한다. 내가 따르는 유일한 사람이다.

-앙투안 그리즈만

 

브라질 대표팀이 단 한 명의 외국인 선수를 보유할 수 있다면 오직 베컴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베컴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이었다. 볼 터치나 원하는 곳 어디든 공을 보내는 능력은 정말 뛰어났다. 또 나를 보고 있지 않았는데 공이 왔다. 나에게 연결한 수많은 패스에 대해 감사한다. 정말 놀라운 선수였다.

-호나우두

 

헐리우드 대표 미남들과 비교되는 외모,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1위 등, 데이비드 베컴 하면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외모다.

또한 외모 관련 설문조사 단골손님이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여성 직원들이 선정한 최고의 미남 1위, '피플지' 30주년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1위, 100만명 이상이 참가한 미국 남성패션전문 '에그스멘닷컴'이 선정한 세계 최고의 남성 1위, '호주 엔터테인먼트 텔레비전'에서 전세계 전문가 20명의 조사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1위 등 수 많은 외모 관련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잉글랜드에서 메트로섹슈얼의 선구주자로 꼽히는 인물로, 이것이 퍼거슨과의 불화에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 사람인 퍼거슨으로서는 빅토리아와 연애를 시작한 이후 점점 계집아이처럼 변해가는 베컴의 외모를 참을 수 없었던 모양. 당시 영국에서는 남자가 머리와 옷차림으로 꾸민다는 것이 거의 금기시되는 풍조였다.

한국에서 데이비드 베컴 관련 글,영상 댓글에서 가장 많이 언급이 되는 것은 '외모때문에 저평가'이다.

 

 

 

베컴 스페셜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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